다사다난한 22년이었다.
즐거운만큼 힘든 일도 많았던듯 하다.
이번 회고도 지난 1년간의 일을 월별로 정리해본다.
3월
코로나 확진
3월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나름대로 외출을 자제하고, 위생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피해 가지 못했다.
3월 당시 회사에서는 코로나 확진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팀에서도 나왔고, 슬슬 차례가 오지 않았나 싶기도 헀다.
확진 첫날 아침, 일어나자 목에서 갈라지다 못해 무언가에 베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평소 농담처럼 했던 “걸린 줄 모르고 지나간 거 아닌가"와는 확연히 다르게,
“아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근처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검사 당일에는 음성이 나왔고, “이게 아닌가”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에는 몸살 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아닐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버티기 어려운 몸살과 근육통이 시작되었고,
보건소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원래 당일에는 오전 근무까지 하려 했지만,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연차로 변경하고 목금토일 4일을 쉬게 되었다.
첫 3일은 정말 죽은 듯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오면 오한이 덮쳐왔고, 몸살로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어려웠다.
문득 19년도 2월에 독감에 걸렸던 것이 생각났는데,
그때는 고열과 몸살로 힘들었다면, 이번은 오한이 너무 심했다.
기침도 많이 나왔지만, 목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신기한 것은 미각, 후각은 그대로였고, 식욕은 그전보다 왕성해졌다.
몸은 아픈데 혼자 살고, 배고픈데 먹기가 힘드니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처음 며칠은 부모님께서 돌아가며 챙겨주셨지만, 이후에는 그렇지도 못했다.
3일간의 고생 후 드디어 열이 떨어지고, 오한이 줄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고,
더 이상 “걸린 줄 모르고 지나갔다"를 믿지 않게 되었다.
8월, 9월
고등학교, 대학교 연사
올해 우연히 두 곳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한 곳은 고등학교 모교 선생님께서 연락해 주셨다.
이번에 전근을 하셨는데, 그곳에도 소프트웨어 동아리가 있다고,
고등학생 대상으로 인공지능 기술의 소개를 요청주셨다.
고민 없이 가게 되었고,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인공지능, 딥러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연구 개발 직종을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할지 전달했다.
사실 인공지능, 딥러닝이 무엇인지 설명할 때는 이미 친구들의 반은 졸고 있었다
어떻게 쓰이는지 보여줄 때 좀 관심을 보이다가,
입시 이야기가 나오니 점점 살아나기 시작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QnA 시간에는 날 것 그대로의 질문이 많았다.
돈 많이 벌어요, 고등학생 때 공부 잘했어요 등등
덕분에 여러모로 에너지도 많이 얻고 온 것 같다.
다음은 회사로 요청이 왔다.
상명대학교에서 인공지능 관련 강연 자리를 주기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가상 인간에 대한 주제로 발표해줄 수 있는지였다.
연구 개발도 어느 정도 정리된 기간이었기에,
흔쾌히 참여하게 되었다.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지만,
이곳의 질문은 달랐다.
어떻게 하면 하이퍼파라미터 튜닝을 효율적으로 하는지,
기업은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는지,
심지어 교수님께서는 무엇이 인간답게 만드는지 물어보셨다.
거의 기업 면접 보는 것 같았다 (ㅋㅋ).
당시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기술은 충분히 인간의 기교를 묘사하기 시작했기에, 의도의 유무가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러고 또 기계의 의도를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
또 다른 기준을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9월
피티 시작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복지 차원으로
챌린저스 서비스 활용 기념, 3개월간 매주 2회 인증을 하면 PT 비용을 환급해준다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물어야 한다고, 바로 PT를 등록했다.
첫 피티, 나는 말랑한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근육이 없어서 맘처럼 자세는 안 나왔고, 처음에는 천천히 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것도 힘들었는데,
하체 하는 날은 특히 억 소리가 났다.
다리가 흔들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나만 더” 하면 정말 이를 악물다 못해 이가 갈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10월을 넘어 이제 조금씩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몸을 잘 쓰는 편이라는 이야기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PT는 3개월이었고, 인증에 성공해 환급받을 예정이다.
이제는 그냥 혼자 3일 정도씩 꾸준히 가고 있다.
올해 만든 습관 중에 가장 건강한 습관이다.
12월
맥주일기
올해도 열심히 맥주 일기를 남겼다.
22년 1월 11일, 22번 구스 아일랜드 IPA부터
23년 1월 4일, 65번 로켓필스까지 43개가 기록되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맥주가 몇 개 있다.
31번 칼스버그 필스너:
첫맛부터 엄청난 청량감이 있다. 우르겔만큼 쇠비린내가 나지는 않은데, 터프하게 압도당한다.
45번 옥토버훼스트 바이젠:
첫맛은 밀맥주의 묵직하고 풍부한 고소함이 있다가, 뒷맛은 부드럽고 가볍다. 대비가 뚜렷하다.
46번 첫즙라거:
라거 특유의 고소함이 너무 맛있다. 탄산도 적당히 있고, 라거의 본분에 너무나도 충실하다.
50번 나인스트리트:
와인을 마시면 나는 포도향과 알콜향이 섞인 올라오고, 강한 탄산이 필스너 같기도 하다.
55번 흑백 임페리얼 스타우트:
첫입은 에일 느낌의 쇳내가 났는데, 혀에 닿을 때는 흑맥주 풍미가 남. 알콜향이 필스너 같기도 하고, 끝은 쓴맛과 탄산감에 압도됨
내년 목표는 100번 채우기이다.
너무나도 소중한 취미가 되었고, 생활의 한 축이 되었다.
여행
올해는 여행을 3번 다녀왔다.
바다가 좋아 이번에도 바다로 많이 다녔다.
5월은 여수에 다녀왔다.
혼자 다니면 항상 끼니가 문제다.
관광지는 어딜 가나 2인분 이상만 팔고,
혼자 가도 2인분은 시켜 먹어야 한다.
여수에서는 돌문어 삼합을 혼자 2인분 잘 땡기고 왔다.
사진을 보여주니 누구랑 갔냐고 지인들이 많이 물어보았지만,
그런 거 없다.
10월 초에는 강릉에 다녀왔다.
면허를 따고 처음으로 혼자 장거리 운전에 도전했다.
가는 길은 정말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도착하고 나니 얼마나 긴장했는지, 어깨가 다 아렸다.
안전히 도착하고 나서는 바다 구경도 하고, 술에 회도 한접시 먹었다.
강릉 바다는 불빛이 많지 않아, 밤에 나가기는 조금 무서웠다.
바다도 지역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차가 서 있었는데,
내 뒤/뒤 차가 뒤 차를 박아 2중 추돌 사고가 났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처음으로 난 사고라 놀라 차를 앞으로 빼느라 추돌 증거가 남지 않아
차 범퍼 내려앉은 것 수리비도 못 받았다.
부모님과는 안 다치고 사고 경험도 해봤으니 됐다고 하고 지나갔다.
매년 가을쯤 부산을 다녀오는 것 같다.
루트도 비슷하다.
오션뷰 방을 잡고, 회 한접시 하고, 장어 덮밥 먹고,
돌아오는 날은 2시간이고 3시간이고 해변을 걷다가 돌아온다.
올해도 같았다.
해변을 걸을 때 유독 생각이 많았다.
회사 일도 많고, 건강도 안 좋으니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바다를 많이 오는 것 같다.
멍도 때려보고, 연락도 무시해보고, 파도 소리도 듣고 그러다 가면 좀 놓아주고 오는 것 같다.
라로 - 연구팀장
1월
22년 1월 음성 연구에서 온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21년 10월 비전팀 창설 이후로, 연구와 매니징의 비중에 관하여 꾸준히 이야기 나눠왔고,
결국 매니징에 올인하는 방향으로 잠정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10월에 입사했던 신입 비전 연구원들은 3개월 차가 되었고,
각자 주제를 맡아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영상 합성과 이미지 합성 2가지로 대주제가 나뉘게 되었고,
새로운 연구 주제를 지휘해야 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 매니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임 연구원들이었고, 기업에서 설정한 목표 보다는 개인의 흥미에 치중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비전팀 주니어 3인의 모든 실험의 설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모든 실험에 우선순위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우선순위의 판단은 당연히 나였다.
일부 팀원은 뭘 해야 할지 모르기에 차라리 업무를 주는 것이 낫다고 했고
어떤 팀원은 안 될 것 같은 걸 시킨다고 의문을 표현하거나, 업무를 수행하지 않기도 했다.
이때 특히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
우선은 인사팀의 추천을 받아 1on1 미팅을 시작했다.
결과를 만들기 위해 팀원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일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했다.
3월
1on1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 드디어 갈등이 있던 팀원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사실 본인은 많은 고민을 거쳤다.
때로는 안 될 것 같은 실험은 까먹은 척 일부로 안 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해봤으며,
이제는 그 둘을 섞어서 진행한다.
"""
많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정말 모든 팀원이 마이크로 매니징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 팀원은 주제만 전달하더라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할지
4월
베리미 프로젝트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캐가 새로운 컨텐츠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비식별화 도구로써 가상 아바타를 이미지나 영상에 합성해주는 서비스이다.
VeryMe를 위한 새로운 PO도 입사하였고, 팀을 꾸려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기존까지 회사에서 개발된 제품들은 대부분 연구 조직과의 공유 없이,
있는 것들을 가지고 제품화 하는 과정이 많았기에, 제품 기획 과정을 볼 일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런 과정을 처음으로 시작부터 지켜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기술 방향성
PO는 입사 후 시장과 사용자 니즈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기업에서 제품을 개발할 때,
“우리가 기술이 있으니, 이거로 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자"에 가까웠다.
PO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시장과 니즈가 있는 곳에 제품을 두고, 거기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연구팀과의 소통 방식이 달랐다.
기존에는 “기본적인” 기술 수준이 갖추어졌을 때 제품 기획이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제품 기획에 맞추어 기술의 “스펙"이 결정되었다.
“기본적인” 기술은 의사결정권자와 시장을 만족 시킬 수 있어야 한다.
타겟팅할 시장이 결정되지 않았기에, 기술은 범용적이어야 했고,
범용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시간을 소모하면, 시장은 변화하고 기준이 바뀐다.
무기한으로 “기본적인” 기술 수준을 맞추기 위해 달리다 보면,
그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
반면 스펙이 결정되고 나니 개발부서의 방향성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시장이 타겟팅 되고 나니, 스펙만을 만족 시킨 최소 기술만 개발하면 되었고,
연구 난이도도 상대적으로 낮아, 시간은 단축되었다.
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제품 기획
시장을 조사하고 니즈를 파악하는 과정도 신기했다.
현대의 사람들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지속성을 가지는지,
그걸 해소해줬을 때 지불의 의향이 있는지
그런 고민을 함께하고,
이의 근거를 찾아 리스트업하는 과정이 연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렇다 보니 초기에 가졌던 걱정은 하나, 둘 정리되어 갔다.
그럼에도 당시 인공지능 생성 시장은 다양한 사회적 논의가 오가고 있었고,
우리의 제품이 정말 우리의 목적대로 쓰일 것인지, 악용의 우려는 없는지 고민되었다.
그를 위한 새로운 기술 피쳐가 논의되기도 하였고,
리서치를 추가해가며 기획은 하나둘 정리되어 갔다.
기술 스펙이 결정되니, ML 연구 및 파이프라인 구축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렇게 6월부터 9월, 비전팀은 하나의 목적지를 두고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6월
연구원 퇴사
6월 적지 않은 연구원들이 퇴사하였다.
씁쓸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을 지원해주고, 도와줬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퇴사 면담 때 물어보았다.
왜 나가는 건지, 어떤 것이 원인이었는지.
다들 다른 이유를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처우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군가는 다른 곳에 이직하게 되어서,
누군가는 복합적인 사정에 의해서였다.
내가 더 해줄 수 있는건 없는지,
내가 바뀌었을 때 남아 있어 줄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답은 해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주었고,
그것을 알기에 나 때문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좋게 퇴사하기 위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도 무력했다.
처음 겪는 팀원들의 퇴사였고, 너무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함께 일하고 싶었는데 어쩌지,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떤 매니저가 되어야 하는 거지,
당장 저 사람들이 나가면 저 일은 모두 내가 해야 하는 건지
처음으로 퇴사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퇴사 면담을 하며 느낀 것은 “갈 사람은 가는구나"였다.
그러고 나니 한결 생각이 단순해지기도 헀다.
나는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고, 나간다면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야겠다.
그럼에도 팀원이 와서 “영중님.. 잠깐 커피 한잔 하실래요..?“이러면 심장 떨린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연이은 퇴사자에 본인도 결국 리서치에 다시 투입되었다.
리서치가 시작되니 모든 실험을 트래킹하는 것이 어려웠다.
7개월 지난 시점에 주니어들도 업무에 익숙해졌다 느꼈기에,
이후부터는 마이크로 매니징을 접고, 주제만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의 만족도는 급속도로 올랐다.
생각한 것을 바로 점검해볼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연구에 대한 제재가 없으니 편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본인의 연구 개발 더 우선이었기에, 팀원의 결과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1on1을 통해 팀원들에게 전달 할 수 있는 메시지는
“모든 선택은 자유롭게 하시되, 결과로 보여주세요” 하나 뿐이었다.
7월
비전 연구원
연구, 개발해야 하는 스펙들이 적지 않았다.
2년을 생성 연구만 해왔지만,
이제는 탐지, 인식, 분류, 추천까지 할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탐지-인식 쪽은 상업 사용 가능한 오픈소스 제품들이 많았다.
탐지, 인식 쪽 모델 중 SOTA라 이야기한 모델들 위주로 검토를 진행했고,
간간이 페이퍼도 리뷰해야 했다.
검토된 모델들은 실제 자사 데이터나 입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전 QA 셋에서 검수 되었고,
과정에서 생성 때는 못 느꼈던 것들이 많았다.
특히 임계치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이상 케이스가 QA 셋에 추가될 때마다 FN, FP의 비율은 달라져 갔고,
이에 맞게 꾸준히 임계치를 수정해 나가야 했다.
이미지 분류 역시 가장 단순한 커널 기반 분류부터,
딥러닝 기반 분류까지 검토해보았다.
특이하게도 이 케이스는 커널 기반 분류가 가장 잘 되었지만,
그 역시 스펙을 만족시키지 못해 기획을 수정해야 하기도 했다.
3인의 퇴사자 업무를 전부 부담해야 했기에,
일이 정말 많고, 커버할 분야도 굉장히 넓었다.
검수를 위한 단순 작업도 많았고,
스펙에 맞게 ML API까지 구성해야 했다.
생성만 하던 업체였기에,
인식, 탐지, 분류, 추천에 대한 API 작업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중에는 이러다 탈진한다고,
단순 작업이라도 도와줄 인턴이나 신임 연구원에 대한 니즈를 많이 어필했던 것 같다.
정말 힘들었지만,
실제로 신입 연구원을 선발하기도 했고,
프로덕트에 대한 신뢰와 오랜만의 연구, 개발의 재미로 버텼던 것 같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금 회사 프로덕트의 ML 인터페이스는 내가 다 만들었다.
9월
재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필요한 연구 개발은 마무리가 되었고,
다시 팀원들의 연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나라면 안 했을 실험"을 돌리고 있었다.
굉장히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실험을 통해 현상을 관찰한다.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델의 성능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으며, PoC에서 프로덕션 수준까지 개발이 이뤄지고 있었다.
신기했다.
연역적인, Model-centric AI를 고수하고 있었기에
귀납적인, Data-centric AI를 통해 나온 결과는 영감을 주기까지 했다.
어쩌면 마이크로 매니징은 내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팀원들은 충분히 성장하였고,
연구 업무를 능숙히 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개인에게 맞는 매니징 포지션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는 논의를 함께할, 의사 결정을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주제만 전달하고, 모든 자율성을 전달받고자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개인에 맞는 포지션을 선정하면서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니저가
내 23년 목표이다.
우리 팀원들이 존경스럽다.
11월
공황
6월부터였던 것 같다.
팀원들의 퇴사가 이어지고,
회사의 여러 뜬 소문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퇴사자의 업무는 모두 나에게 돌아왔고,
가중되는 업무 속에서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어느 날은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연구에 나섰다.
본인의 아이디어를 구현해주길 원했고,
프로덕트 개발 외에 새로운 연구 업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부에서는 연구팀이 진행했던 업무에 끊임없는 질문이 들어왔고,
하루 8시간 근무 중 이완 없이 항시 긴장 상태로 대기했다.
나 자신이 점점 감정적으로 변한다고 느꼈다.
회의 중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생겼고,
점점 심장이 무리하게 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일요일 밤 잠이 들기 전 극심한 공포감이 찾아왔다.
숨을 쉬기 어려웠고, 이러다 질식으로 의식을 잃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다시 진정되었다.
몸이 정상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다음 날 월요일, 이제는 회의 중에 의사결정권자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목소리에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후, 바로 병원 진료를 예약했다.
병원에 가기까지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보다,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이상 회의에 참여하거나, 인원이 많은 공간에서 업무를 보기 어려웠다.
결국 논의를 통해 매니저를 그만두고,
혼자 업무를 볼 수 있는 연구원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려 했다.
CEO와는 합의를 보았지만, 인사팀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CRO의 입사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었고,
CRO가 입사한다면, 대외 업무를 분리해갈 테니
그 후엔 테크 리드의 포지션을 잡고,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일반 연구원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금까지 수행해온 매니저의 롤에 팀원들의 관성이 이어질 테니,
천천히 롤을 분리해가는게 안전할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후 꾸준한 논의와 시도가 있었다.
더 악화될 경우, 회의에 들어오지 않고 서면 대체하기로 하였고,
테크 리딩 외 내외부 매니징을 모두 1달간 임시 보류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지나니,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비정상적인 심박도 줄어들었다.
정말 CRO의 입사만을 바라보며 1달을 신경 안정제와 함께 버텼다.
12월
기존까지는 팀 내/외 매니징을 모두 전담하고 있었다.
팀 내 연구 관리나 실험 기획에 대한 디테일부터
팀 외 분기 단위 연구 로드맵 설계나, 프로덕트 니즈 파악, 시장 기술 점검 등 다양했다.
연구하기 위한 리소스를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일주일은 팀 내 연구 방향성 관리 아니면 팀 외 부서 간 회의로 보냈다.
그러던 중 11월 CRO가 입사하였고, 팀 외 매니징에 관한 리소스를 인계하게 되었다.
업무가 줄어들고 나니, 병세도 호전되었고,
그러고 나니 문득 연구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이 결과를 보인 것처럼 나도 연구로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CRO, CEO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고,
끝내 22년 12월부터 다시 음성 연구원으로써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굉장히 설렜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비전 연구 당시에 얻었던 인사이트들도 적용해 보고 싶었고,
지식 관리 체계에 대해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12월, 굉장히 빠른 속도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래도 1년 헛보내진 않았구나 싶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안도의 감정이 더 컸던 듯 싶다.
결과물에 대한 부담, 연구원과 매니저
어찌 보면 나는 결과에 대한 강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음성연구원 당시부터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오히려 매니저가 나한테 더 잘 어울리나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매니저가 되어서 나를 입증하고 싶었다.
우리 팀이 결과를 냈으면 좋겠고, 그게 실제 프로덕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더욱 매니저 초기에 팀원들을 압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3분기를 넘어 4분기가 되고,
자율성을 얻은 팀원들이 오히려 결과에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팀원들에게 1on1 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실패보단 시행착오를 하는 부서였음 하고, 우리의 결과가 시행착오라면 그 역시 성과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시행착오를 잘하는 사람은 맞는 것 같다.
결과를 분석하고, 현상으로부터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단지 나의 지식이 프로덕트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식이 프로덕트로 이어지도록 잘 가이딩할 수 있고,
이어진 프로덕트가 시의적으로 시장에 맞아떨어진다면, 그것이 스타트업 초기 내가 내고 싶던 성과이다.
이젠 회사에 후자를 도와줄 사람이 생겼기에,
23년 나는 다시 연구원에 욕심을 내서, 전자를 더 잘해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on2022
연구 지식이 많이 늘지는 않았다.
매니징에 치중한 만큼 21년보다 논문도 덜 보고, 코드도 덜 작성했다.
내가 직접적으로 얻은 경험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도는 다양했던 것 같다.
음성 연구를 넘어 이미지나 비디오 합성 연구를 시작했고,
팀원들의 연구 방식을 보며 여러 영감도 많이 얻었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연구의 방향이 다양해진 것 같다.
매니저로 있으면서 느낀 것도 많다.
기업에 있으려면 어찌 되었든 기술이 가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가치를 통해 기업에 이익이 남아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연구는 속도감만큼 방향성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술이 단순히 기술로만 남지 않고,
가치를 통해 제품에 랜딩 되어 사용자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사용자의 니즈도, 기술의 가치도 모두 중요해졌다.
또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
각자의 이야기가 다르기에,
이해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고, 할 수 있는 것도 다르다.
내가 이들을 재단하지 못한다면,
내가 맞추어 가며 최대의 가치를 창출해내야 한다.
이 모든 걸 동시에 잘 하는 슈퍼맨이 되기는 어렵기에,
23년에는 우선 기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